어학코스를 끝내고 길고 긴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조금은 지루할 방학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간 읽고 싶었던 책들도 몇권 빌리고, 집에 있는 CD를 뒤지다가 예전에 다운 받아두었던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를 발견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스물여섯편이나 되는 시리즈를 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컴퓨터 책상 한켠에 쌓아만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곤, 여유롭다면 여유롭고 심심하다면 심심할 그 시간에 별 생각없이 별 기대도 없이 보기 시작했다. -카우보이 비밥이야 워낙 매니아 팬들이 많은데다가 그 입소문 때문에 일부러 구해뒀겠지만 일단 우주선이 나오는 것이 별로 내 취향이 아니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서는 이틀만에 다 봤다. 그것도 참으로 재미있게.


우선 널리 알려진 대로 카우보이 비밥의 매력을 몇배로 살려주는 것은 바로 칸노요코의 음악이었다. 말로만 듣던 것을 직접 확인했다. OST를 구해서 듣고 싶을만큼 음악이 참 좋았다.

"비밥호에서의 하릴없는 일상은 중년남성들의 권태와 쓸쓸한 일상의 반복을 상징한다"는 말을 제작진 중의 누군가가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감독이었는지 각본을 쓴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스탭이었는지는 당연히 기억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했다니 그런 것이겠지만, 현대인들, 보통의 요즘 사람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렇게 모든 일에 cynical한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또 있었나 싶긴 하다. 과거는 베일에 가려져 있고, 사는 데 있어 어떤 것도 열중하는 것이 없는 주인공. 그러나 이 우주를 떠도는 현상금 사냥꾼의 반복적인 일상은 오히려 코미디부터 호러까지, 미치광이 테러리스트부터 인공지능 컴퓨터까지 모든 것을 끌어 쓸 수 있는 이유가 됐고, 이로 인해 '카우보이 비밥'이 동서양의 모든 대중문화 코드를 녹여내어 일반 시청자와 매니아 양쪽이 모두 만족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스물여섯편의 시리즈에서는 사회풍자적인 내용도 쉬이 발견된다. 'Brain Scratch'의 사이비 종교는 실제로 갖가지 종교단체로 인한 사회문제가 있어왔던 일본 사회에 대한 풍자일 것이며, 바다쥐 포획을 반대하는 환경단체를 위험천만한 테러집단으로 그려낸 것은 세계 환경단체들의 일본 고래포경 반대에 대한 따끔한 일침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문화적 힘은 경제력과 함께 일본이 부러운 점이기도 하다. 여기, 호주인들 중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매니아들이 꽤 많으며 DVD shop에 가 보면 일본 작품은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영화 DVD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카우보이 비밥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TV에서도 주말 오전에 자주 방송해 주기도 한다. 일본의 문화적 힘은 그 경제력에 의한 부가가치로 주어진 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겠지만 서구인들의 일본에 대한 호감은 생각보다, 듣던 것보다 더욱 크다.

물론 꽤 여러편의 한국 영화도 TV에서 보여주긴 하지만 방송시간은 주로 밤 12시 이후.
-여기 사람들 참으로 일찍 하루를 마감하는데... -_- 방송해 주는 작품도 '조폭 마누라' 뭐 이런 것들. '친구', '플란다스의 개' 정도가 가장 봐 줄만 했던 영화였다. 볼 때마다 '우리나라에 좋은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하면서 아쉬워만 한다. 호주 친구들한테 내가 가진 한국영화 DVD를 빌려 주려고 해도 그 망할놈의 지역코드 때문에 볼 수가 없고. 쩝.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다시 비밥으로 돌아오면.

우야든동, 궁금하다.
스파이크는 죽었을까?!

한국에서 이 영화를 봤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아니, 자주 생각한다.

호주에 온 지 넉달쯤 지났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진정, 영화에 목말라 있었다. 특히 한국영화에 목말라 있었다.
짐이 너무 많아서 한국에 있던 내 DVD는 당연히 다 가져올 수 없었고,
그나마 챙겨온 몇개도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까해서
죄다 영국영화만 골라서 들고 왔었다.
그러던 차에 알고 지내던 한국 사람이 빌려준 CD에 이 영화가 있었다.
다시 CD에 구워서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는 영화이며,
그 간 아마 한 세번쯤 봤던 기억이다.

한국에서 봤다면?
뭐, 그닥... 지금처럼 좋아라 했을까 싶다.
연기는 잘 하지만 별로 안 예뻐하는 임창정.
징그러울 정도의 애어른 꼬마.
스토리도 좀 상투적이고.

그치만,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눈물나게 행복했던 그때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이 좋아서였다.
내용이 별나게 재미나서여도,
주연배우가 무지 좋아서도,
좋아하는 감독이 만들어서도. 아니고.

그저,
영화에서 잠깐이나마 볼 수 있는
땅끝에서 보는 바다.
지리산 자락.
흔하디 흔한 시골 한구석의 구멍가게.
철원 어디메 쯤으로 보이는 추수가 끝난 논.

그날 밤에,
난 오랜만에 한국 산천을 마음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아쉬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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