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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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든 영화든 읽는 동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부 날을 세우고 튀어 나와 여기저기 쿡쿡 찔러대며 아프게 하는 이야기들이 가끔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그런 경우였다. <네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모두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고, 이 책도 처음 읽을 때 그랬었지만 딱 한번 읽고 나서 다시 손이 가질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읽고 난 후유증이 너무 컸던 기억이 계속 남아 있어서... 4년 만인가보다.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던 책을 다시 꺼내 책을 펼쳐 읽은 것이.

몇년만에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무척 독자를 힘들게 하는 소설이다. 정유정의 소설을 읽을 땐 모든 작품이 나를 그냥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 만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탄탄하고 빈틈없는 치밀한 스토리 라인. 거기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삶과 감정들이 다 팔팔하게 살아 숨 쉬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그들에게 깊숙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야기' 자체가 살아 숨쉬는 작품을 쓰는 작가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그 후유증과 잔상이 더 길게 남는다.  

<28>은 원인도 이름도 모르지만 걸리면 눈이 빨개지고 폐출혈이 일어나 24시간 안에 100% 사망에 이르게 하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일명 '빨간눈 괴질'이 돌며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면서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상태가 된 서울 근교의 가상 도시 '화양시'가 이 소설의 배경이다. 아이디타로드 한국인 최초 참가자였으나 늑대의 습격으로 자신의 썰매개들이 모두 몰살되고 그 죄책감을 고스란히 안고 유기동물 보호소 드림랜드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 수의사 최재형, 익명의 제보를 받고 쓴 폭로성 기사 하나로 재형의 드림랜드를 파산 위기로 몰고 간 한진일보 신문기자 김윤주,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네수진이라고 친구에게 놀림받는, 결국 마지막까지 괴질 환자들을 돌보다가 야만적인 폭력에 죽어간 간호사 노수진, 사랑하는 아내는 개떼들에게 잃고 보물같은 딸아이는 괴질로 잃고 결국 혼자 남게 되는 119 구급대원 한기준, 부모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학대 받은 상처를 그 아버지의 개를 죽이는 일로 해소하며 살다가 쿠키와 재형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 공익요원 박동해 그리고 또 투견판에서 살아남고 괴질이 처음 시작된 개장수 집에서 도망쳐 나와 스타에게 열렬한 구애를 펴는 늑대개 링고, 재형이 가장 아끼던 스타, 동해에게 잔인하게 살해될 뻔한 상황에서 재형이 구해낸 쿠키. 고도가 된 화양에서 얽히고 설키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원인모를 괴질의 창궐을 막아 보겠다며 고립 시킨 화양 시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는 자꾸만 80년 5월 광주가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정부는 빨간눈 괴질의 창궐이 국가 위기 상황이라는 미명 하에 해결 방법을 찾기 보다 먼저 도시를 봉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언론을 검열, 통제해 버리고, 심지어 구호품 조차 보내지 않는다. 그저 봉쇄시킨 도시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 고사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 통제 안에서 일상을 살던 개인을 삶은 아무렇지도 않게 처참히 짖밟힌다. 이 점에선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우리 현대사 속에서 공권력의 야만적인 폭력에 희생당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무법천지가 된 화양시에는 강도 강간 살인이 대낮에도 버젓이 자행된다. 마지막까지 의료소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던 간호사 노수진이 하필 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장면을 읽으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슬프지만 인간의 지성과 감성은 극한 상황에서는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인간도 결국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이니까. 그러나 내가 믿고 있는 고귀한 인간이란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이 빛나는 존재들이다. 쉬차를 잃고 평생 가슴에 낙인처럼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다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개 스타를 죽인 한기준을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재형이 바로 그 고귀한 인간이겠지. 나는 재난 속에서 나보다 남을 위하는 행동따위 할 수 없을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 뿐 아니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고귀한 이들을 존경하며 살기위해 노력한다. 그리하면 적어도 본능만 남은 추한 인간은 안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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