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이맘때면 다음 해에 쓸 다이어리를 신중하게 고르러 다녔다.
고르고 골라 장만한 다이어리에
가족, 친구들의 생일과 내 기념일이나 중요한 날짜들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전화번호와 주소를 신중하게 옮겨 적고
제일 뒷장에 내 이름, 이메일, 주소를 적은 후에

그리고 다가올 새해엔 뭘 해야하나 생각을 하지.

여행은 어디로 언제쯤 갈까?
1월에나 2월에는 일단 경주에 다녀와야지.
봄엔 뭘할까? 바쁜 봄엔 여행 다닐 시간은 없을게야.
학부생들 춘계 답사갈 때 대학원생들 많이 따라가면 거기나 슬쩍 묻어갈까?
그것도 안되면 틈나는대로 가까운 여주나 다녀와야겠네.
여름엔 길이 막히니 바다가 있는 곳은 피해야겠지.
아, 그 해 여름, 남해는 눈 부시게 아름다웠는데 올해도 한번 가볼까? 그 때같을 수 있을까?
가을엔 지리산이 좋겠네.
다시 겨울엔... 어딜 가든 그 곳에 눈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더할 수 없이 고즈넉하던 눈 쌓인 정림사지,
잠시 피안의 세계에 다녀온 게 아닐까 싶었던 온통 하얗던 경주 남산,
어디에도 사람이 밟은 발자국 하나 없어 강아지 마냥 뛰어 놀던 돌박물관.

내년엔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세미나랑 스터디 준비는 한 세배쯤 열심히 하고,
올해는 러시아어 공부도 좀 열심히 해야겠다.
학원만 다니고 공부를 너무 안했네. 한문 공부도 좀 신경써야해.
난 한문이 너무 약해. 사실 재미도 없지만...
사료도 열심히 모으러 다녀야겠어.
그리고 좀 진중하게 살펴봐야지. 뭐 재미난 거 하나 정도 찾을 수 있겠지?!
아- 읽고 싶다고 잔뜩 모아놓은 저 논문들도 빨리 읽어야지.
교수님이 시키시는 일도 땡땡이 그만치고 좀 성실하게 해 드려야겠군.

그리고, 새해엔 공연이랑 영화 좀 그만 보자.
도대체 돈이 안 모인다. ㅜ.ㅜ
DVD랑 책 충동구매도 심각해. 줄여야 해!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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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다이어리를 샀다.
작년엔 모든 일이 처음이라 낯설고 서툰 육아에 헉헉대느라
아이에 관한 짤막한 기록으로 채워보려던 다이어리가 온통 백지에 가깝다.

전처럼 가방에 넣어 매일 가지고 다닐 것도 아니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우리 딸이 엄마가 되면 보여줄 요량으로 쓸
제법 크기가 있어 쓰기 편한 걸로 장만했다.
언젠가 먼 미래에 역시 처음 엄마가 된 내 딸에게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너를 키웠더구나.
그때 나는 너로인해 참으로 행복했더구나 하면서 힘을 줄 수 있으면,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몇년쯤 후의 다이어리는 다시 내 생활, 내 생각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새 다이어리를 고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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