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

80년 광주의 5월에 대한 글도 영화도 자료도 참 많이 봤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친구가 가져온 비디오 테잎을 독서실 비디오 룸에서 봤을 때의 충격도 고스란히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각종 자료들도 많이 봤고 볼 때마다 참 힘들었다. 헌데 이상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순간보다 더 직접적인 고통스러움을 경험한 것 같다. 작가가 쓴 구절 구절이 전부 길고 날카로운 바늘로 변해 내 심장을 마구 찔러대는 기분이었달까? 5.18을 처음 알게 된 이래로 그 때의 희생자들에게, 유족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감정이 이입되어 읽고 난 후에도 한참을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읽는 사람도 이렇게 힘든데 작가는 얼마나 앓아야 했을까.

그 피해자들, 유족들, 심지어 그때 그 도시에 있지 않았던 국민들도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전두환이 마지막까지 천수를 누리다 편히 죽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분노가 올라온다. 노태우 그 놈도 진짜 사과하고 싶었다면 죽기 전에 밝혔어야지. 이 와중에 아직도 대선후보가 아직도 전두환을 옹호하는 발언이나 내뱉는 상황이라니 진짜 역사는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내 믿음이 틀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 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17>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p.134-13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나는 왜 <소년이 온다>를 읽고 바로 하필 이 책을 잡았을까.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할 수 있는지 과연 그 잔인성과 광기에 한계는 있는 것인지 궁금한 사건들이 우리 역사에는 참 많다. 슬프고 아프게도.... 내가 한국을 떠나온 후에 제주 4.3 평화공원이 개장을 했던데 한국에 가게되면 그리고 그때 제주에 갈 기회와 시간이 있다면 꼭 아이를 데리고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다. 예원이도 다음에 한국에 가면 제주도에 가 보고 싶다고 했으니 그때는 제주 여행을 계획에 넣어 보아야겠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고,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P. 317-318>

 

 

한강, <흰>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 어드메 즈음에 있는 듯한 글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쓰지?

이 책도 역시 국가 혹은 집단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그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한강의 소설은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고 이 곳 도서관에서 영문판으로 된 걸 빌려다 읽은 게 전부였는데 이번에 번사이드 도서관에 새로 세 권이 들어와 있길래 빌려다 읽었더니 그 여운이 엄청나다. <소년이 온다>는 소장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흰>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건, 내가 이 책을 빌려다 테이블에 올려둔 걸 보던 딸이 이 책 여기저기 도서관에 영문판이 많이 있다며 "유명한 책이예요"라고 하던데 이 소설이야 말로 영문으로 어떻게 번역이 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국어가 아니면 그 맛이 전혀 안 느껴질 것 같은 문장들이 많아 보이는데... 궁금 궁금. 얼른 찾아 홀드해야지.

 

눈보라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63>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 80>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혼들은 자신들이 총살된 벽 앞에 이따금 날아들어, 그렇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파닥이며 거기 머무르곤 할까? 그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p.109-110>

 

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p.126>

 

아랫니

언니, 라고 부르는 발음은 아기들의 아랫니를 닮았다. 내 아이의 연한 잇몸에서 돋아나던, 첫 잎 같은 두 개의 조그만 이.

이제 내 아이는 자라 더이상 아기가 아니다. 열세 살 그 아이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 뒤, 고른 숨소리에 잠시 귀기울이다 텅 빈 책상으로 돌아온다.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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